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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살자

[역사] 고려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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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고려전쟁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 (성종 12년) 10월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전쟁이다.

 

소손녕과 서희의 외교 담판

소손녕 :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을 잘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서희 :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 안팎은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약하고 교활하게 거짓말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 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하지 않겠는가?

 

1차 고려전쟁 결과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2차 고려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야율융서)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해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 하자 서북면도순검사 장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숙청한 뒤에 홧김에 목종까지 폐위해 버리고 대량원군 왕순을 옹립한 뒤에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를 강조의 정변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이 정변을 구실로 삼아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이유로 40만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이 침략한 진짜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막아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다시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2차 고려전쟁 결과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전라도 나주(羅州)로 피신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는 도중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3차 고려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거란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 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3차 고려전쟁 결과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고려거란 전쟁의 소문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고려는 이후 200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지낼 수 있었다. 거란은 이 긴 전쟁으로 인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이미지출처 : KBS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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